보통 10시에 운동을 하러 나가면 열한시에 돌아오는데, 운동복이 세탁되어 있지 않아 한시간의 공백이 생겨 어쩌다보니 블로그 글을 업데이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올렸던 블로그 마지막 글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첫 공기업 인턴 서류통과부터 실습의 마침과 동시에 교회 현장에 갈 수 있게 된 것. 말씀사경회와 성도의 교제. 매일 운동을 달성했던 것. 단조로운 취업준비생 삶에도 계절을 느낄 순간과 여유를 주셨다.
#성도의교제






결국엔 아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됐지만 주일에 시간을 내서 교제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공동체의 분위기 치곤 꽤 발전했다. (그렇겠지..?) 특히 1청에서 같이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비록 군문제 때문에 1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이 기간 동안 공동체에 잘 붙어있을 수 있도록 챙겨주고 싶었다. 아무리 아는 사람이 있다해도 매주 공동체 나가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랄까? 이제 사복 1급 시험 모드로 들어가겠지만 주일은 비워둬야지.
#공기업
내 사전에 없던 단어인 공기업. 취업난이 날로 심각해지고 평생직장, 정규직의 문의 통과는 무슨 문을 두드리는 것 조차 힘든 시기에 나는 기업에 들어가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업 조직에 몸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돈을 많이 주고 복지가 좋은 것 외에 공기업, 대기업의 환상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성향에다가 한 번 발들이기에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성격 때문에 남들 다 있다는 한국사, 컴활 자격증과 토익 점수가 있을리가 있나.
그렇게 할 일 하며 살고 있던 내게 대학 친구가 스쳐 지나가며 한 말이 발단이 되었다. 내년에 주거복지센터가 전국화가 된다는 우리 학교 교수님의 말을 해주며 분명 전망이 있는 분야이고 우리가 전공했던 분야와 비슷하기 때문에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왠지 모르게 솔깃해졌고 복지분야니까 인턴에 한 번 지원해볼까? 하는 맘에 냅다 지원했다. (주변인, 엄빠, 남자친구에게도 이 사실을 숨기고 지원함)
서류에서 자기소개서 100%를 2~3배수로 거르기 때문에 기대도 안했지만 정말 열심히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서류는 통과하고 면접에서 탈락하여 인턴은 안됐지만 복지의 연결성에 대해 체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복지의 분야는 정말 광범위하고 모두 연결되어있어서 내가 이 분야만 선택해서 올인할거야! 하는 마인드를 버리게 됐달까..? 이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욕심은 버려….(1급 시험부터 붙고..)
#교회적삶?
우리가 어릴 때부터 외웠고 공예배에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모호한 구조가 있다. 이것은 한국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에서 나타나는데 ‘나는 ~ 믿습니다.’ 사이에 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는 삼중 구조로 보이는 모호함이다. 하지만 원문과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보면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구조로 그치지 않고 마지막에 교회를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언급한다.
…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여기서 catholic은 공교회를 뜻하며 public의 의미가 아닌 우주적인,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교회임을 나타내는 의미다. 사도신경은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말하며 이는 신자로서 교회가 나의 선택이 아닌 반드시 믿고 붙잡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야 함을 말하고 있다. 왜? 경험상 정의가 아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으로 (마16:19), (마18:18)에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사도들에게 주셨다. 이는 오늘날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닫음의 열쇠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 열고닫음은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 권징으로 이것은 교회의 직분자를 통해 실현시키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참 교회(택함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그의 몸)는 어떤 사람들이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참 신자들이(비록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이 섞여 있을지라도) 행하게 될 어떤 일들이 드러남으로 인해서 자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고, 참 유형 교회에 요구하는 바의 말씀과 성례와 권징에 충실할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의 이 같은 활동들이 현존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가견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G.I. Williamso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제 25장 교회
물론 완전히 순수한 교회는 없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교회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목표가 실현되는 때라야만이 우리 눈에 그 교회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무형교회).
하지만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가 신실하게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이 살핌에는 우리나라의 교파가 나뉘게 된 이유와 교단의 특성을 비교하여 무엇이 더 성경적인가? 하는 고민까지 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신과 통합이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단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순종에 필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그 교단이 전체적으로 기초적인 순수성을 잃지 않고 참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2. 실재하는 그릇된 사상들을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싸우는 권한이 제한되어 있지 않아야 하고,
3. 진리를 옹호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싸움이 있어야 한다.
G.I. Williamso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제 25장 교회
성경은 신앙과 믿음을 ‘내’가 알아서 믿고 고백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에게 구현되는 바가 신실한가? 보이는 것에 집중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안식은 쉰다, 논다의 개념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이 안식이고 죄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운 자들이 ‘원래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 말씀 안에 있도록 하는 그것이 안식이다. 이 삶을 할 수 있는대로 내가 마음가는대로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5문은 이렇게 말한다.
질문 55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첫째로, 믿는 성도 모두 그리고 각각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다 함께 그리스도와 그가 주시는 모든 부요와 은사들에 참여함을 믿습니다.
둘째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신자들 각각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들을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하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은사는 재능이 아니다. 은사는 나의 부족과 상대의 부족을 서로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는 그 은사를 다른 지체에게 사용할 ‘의무’를 지닌다. 이 의무는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닌 신자라면 기꺼이 행하는 의무이며 기쁨이다. 하나님을 믿는다하며 지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기쁨과 믿음은 공예배로부터 얻는다. 교회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씀을 기초로 말씀을 들으며 가르치고, 살피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과 열심과 노력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그것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들이 믿음을 만들지 않는다. 나의 삶에서 주일을 방해하는 범위에 대해 늘 긴장하고 생각하며 나의 행동을 가벼히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나는
말씀 사경회를 통해 이런 저런 나눔을 하다보면 같은 말씀이라도 다름을 느낀다. 특히 이 말씀에 대해 대놓고 반발심이 든다며 내년에 우리 교회에 있어야 할 지 고민이 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 정신만 본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말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구나 하는 이도 있었다.
말씀 사경회 중 언급하신 내용이 굉장히 많았다. 성찬, 세례, 공예배, 이명증, 주일날 돈 쓰는 문제 등등..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마태복음 18장 본문에 나오는 ‘실족’은 시험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교회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올바른 길을 언급해야 하는 것이 그를 ‘실족’치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반하는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말씀을 계속해서 노출하여 그가 돌아키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돌이킬것이고 아니라면 그 삶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이라는 거다. 그렇게 처음에 혼자, 두세증인, 교회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올바른 삶에 대한 나눔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고 지체에게 살펴달라 요청하는 것. 여러모로 참 감사한 시간이다.
